풍류를 꽃피운 황진이
황진이에 대하여
황진이는 송도의 기생이었다. 기생으로도 여느 기생과 같은 기생이 아니었다.
다재다능한 명기였다. 명기 중에서도 명기요, 뛰어난 예술가였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조선해어화사}(1926)에서 우리나라 역대 명기를
다음 몇 갈래로 나누어 말한 바 있다.
유재모이채지명기(有才貌異彩之名妓)
능시가서화지명기(能詩歌書畵之名妓)
선해담지명기(善諧談之名妓)
절의효지기(節義孝智妓)
이러한 갈래 중 황진이는 재모와 시가의 두 조항에 들어 말하였다.
말하자면, '출중한 재주'와 '경국의 미색'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한시와 시조·
노래에도 뛰어난 명기를 꼽았다.
이러한 황진이인데도 그녀의 생몰년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김지용(金智勇)은 {역대여류한시문선}(1973)의 [황진이 약전]에서 그녀를
중종 때의 명기로 보고'중종(1506∼1544) 초엽에 활약'하였다고 했다.
그녀와 교유한 당시 명사들의 생존년대로 미루어 추정한 것이다.
명사들과의 이야기도 몇 가지 야사·시화류에 극히 단편적으로 전할 뿐이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송도기이},
허균(許筠, 1569∼1618)의 {식소록}, 서유영(徐有英, 1801∼1853)의 {금계필담},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숭양기구전}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처럼 영성한 자료인데 비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인구에 화자 되고 있다.
그녀의 재주와 미모가 그렇고, 그녀가 남긴 시조와 한시가 그렇고, 풍류롭게 살다간
한 생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녀의 무덤은 오늘의 북녘에서도 개성 근교인
장단(長湍)에 잘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되 챙겨볼 수 없게 되었으나, 그녀의 삶이나 시조에 대한 생각은
저때나 이때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내 앞에 한 폭 미인도로 떠오른다.
그것도 꾸밈없는 검소한 옷차림에 담장한 미인의 그림이다.
그녀의 시조는 언제나 되 읊어도 치렁거린 멋이다.
물론 그녀에겐 정한(情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과 한도 안으로 접어 노래로 다스린 고즈넉한 멋이었다.
그녀의 이름에 생각이 미친다. 본명은 진(眞)이다. 이로하여 어려서는 진이(眞伊),
기생이 되어서는 명월(明月)이라는 이름이었다.
― 眞에서는 순수, 진실, 자연을 생각하게 된다.
― 明月에서는 청산, 녹수, 청풍이 어울어져 떠오른다.
그녀의 삶에도 그녀의 시조에도 '진'과 '명월'이 어려 있다.
아니 바로 '진'과 '명월' 그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풍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풍류는 고매불기(高邁不羈)한 것이다.
거기엔 맑은 바람의 흐름이 있고 밝은 달의 얼비침이 있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여섯 수 시조에서 풍류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기생들의 시조에는 대부분 그 시조가 지어진 유래 같은 것이 곁들여져 전한다.
소춘풍의 시조에 문무군신(文武群臣)들의 술자리 이야기가 따라 있고,
소백주의 시조에는 박엽(朴燁), 이매창의 시조에는 유희경(劉希慶),
매화의 시조에는 춘설(春雪 : 妓名), 구지의 시조에는 유일지(柳一枝),
한우의 시조에는 임제(林悌)와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것과 같다.
황진이의 여섯 수 시조에는 유래담이 전하는 것도 있고, 전하지 않는 것도 있다.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는 종신 이씨(李氏) 벽계수(碧溪守)와의 이야기가 전한다.
'碧溪守'는 벽계고을의 수령, 시조에선 이와 음이 같은 '碧溪水'라 하고
자신의 기명인 '明月'을 짜넣은 황진이의 기지(機智)다.
얽힌 이야기는 {금계필담}에 전한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가.
이 두 수 시조에는 한 인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정이 담겨 있다.
인걸은 누구였을까.
문헌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화담 서경덕(徐敬德)이 아닐까.
황진이가 평생 '성인'으로 우러러 사모한 인물이 화담이었기 때문이다.
화담과의 이야기는 {식소록}에 전한다.
― 진랑은 평생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에게 가서 즐기곤 하였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의 30년 면벽수양을 꺾은 바 있으나,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셨다.
― 조랑은 송도삼절(松都三絶)을 말하기도 하였다.
'송도삼절'이란 황진이가 어느 날 화담에게 한 말이다.
'선생님, 송도에는 절미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박연폭포와 선생님 그리고 소인입니다'의 대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황진이의 '고매불기'한 풍류를 느낄 수 있다.
두 수 시조는 화담에게 소관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황진이의 풍류는 속세를 떠나 산수를 즐김에도 있었다.
금강, 태백, 지리 등 여러 산을 유람하고 송도로 돌아온 것은 화담이 세상을 뜬 후였다.
그녀는 화담정사의 물가에 나가 앉아 '지나가는 것은 물과 같은 것, 밤낮없이 멎지 않는다'
는 공자 말씀을 되 챙겨 보며 생전의 화담을 애도하고 추모한 시조인 것이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이 세 편은 정한을 길어낸 시조다. 상대방은 누구였을까.
이에 따르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
기생이었으니 각기 다른 대상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보면, 이는 황진이의 풍류를 모르는 이야기다.
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정한을 노래한 연작(連作)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이 사랑의 대상을 양곡 소세양(蘇世讓)으로 보고자 한다.
임방(任防, 1640∼1724)의 {수촌만록}에 전하는 다음 이야기로 하여서다.
― 양곡 소세양은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어느 날 친구들과 약속하기를, '황진이가 재색겸비한 명기라 해도 30일
동안만 동숙하고, 더 미련을 가지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기한이 다한 날, 황진이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다만 한 가지 청이었다.
'변변찮은 시 한 수 드리고 싶습니다'. 양곡은 이 시를 읊고 나서,
'내가 그래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고 자조하며 더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저 때 황진이의 시는, [송별 소판서 세양](送別蘇判書世讓)의 제목으로 전한다.
칠언율시의 전·결구는 다음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차갑고/
매화향기는 피리 속에 스며들어 그윽하여라/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진 후에는/
그리는 마음 푸른 물결 같이 길리라.
(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明朝相別後 情意碧波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