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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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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우글로벌 댓글 0건 조회 428회 작성일 17-08-04 10:42

본문


완당 김정희에 대한 삶과 학문과 예술에 대한 접근

완당평전 1 /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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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전 / 추사가 죽기 3일 전 쓴 글씨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눈 명작 (봉은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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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1786~1856)

 

 

   추사 김정희는 최고의 서예가이고,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고, 학문은 경학 중

주역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불교의 선지식이 높았으며, 문인화의 대가였기에 접근하기 힘든 산

이었다. 완당이 경학의 대가인 것은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가 밝혔다. 세상에서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하였다. 추사를 함부로 논하기 힘든 이유는 추사의 글씨인 추사체가

어렵다는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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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그림 불이선란도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로 경주 김씨 월성위이고, 아버지는 판서를, 어머니 집안도 기계 유씨 집안

으로 문장과 글씨로 내노라 하는 등 53개 군현에서 추렴하여 추사고택인 집을 지을 정도로 대단

하였다. 묘비문에 풍채와 도량은 뛰어나다 했으나 의리(義利)나 이욕(利慾)을 다투는데 창끝

같아서 막을 자가 없다 하였으니 실상은 더했으리라는 짐작이다. 호는 처음에는 추사(秋史)라

하였으나, 연경에 가서 나중에 사제관계로 모신 완원에게 완당(阮堂)이란 호를 받아 한창 때는

완당을 쓰게 되었다.

 

실학은 중국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동향이었는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에

이어 김정희가 토착화 하였다. 스승 박제가를 만난 것도 인연이었지만 박제가의 도움으로 연경에서

옹방강완원을 만난 것이  완당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수시로 방대한 자료와 귀중한 책을 얻었고

사제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30이 되던 해 북한산 비봉에 있던 비가 진흥왕순수비 임을 밝혔고,경주 무장사비를 통해 왕희지체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명비를 발견하였다. 지금은 소실된 남한산성 이위정 현판, 묻혀버린 옥인동

'松石園' 바위글씨를 썼고,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30대에 쓴 최고의 해서작품이다. 대체로

40 중년까지 완당의 글씨는 매우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글씨이고, 중년에 들어서서 글씨에 서려

있는 자신감과 웅장한 필치에서 대가의 기개가 흘렀다는 평가다.

 

완당은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었고 진보적이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완당의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가면서 중국 학예인들과 교유가

더 늘었고 완당의 글을 구하고자 서신을 통해 친교를 원하는 일은 만년까지 계속되었다.청으로 가는

편이 있으면 문물교류를 계속하여, 청나라 경학을 집대성한 '황청경해'(180여종 1400여책)을 몇 년

에 걸쳐 입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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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계 / 완당이 함경감사로 자신을 돌봐준 후배이자 제자인 침계 윤정현을 위해 써준 글씨

 

 

   완당은 중년에도 금석연구를 계속하여 주위 인사가 외직에 나가면 그곳의 중요한 탁본을 무수히

부탁하였다. 경주 남산 창림사터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앞부분을 발견하였고, 벗 권돈인이 함경

감사로 나갈 때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찾도록 하여 재발견하게 하였다.

 

청나라 서예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여 소견을 자신있게 말하였고, 국내에서도 그러하였다. 이광사가

쓴 글씨에 대해서는 혹독하였고 독불장군식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아끼는 제자에 대해서는

엄청 아꼈다. 이상적은 학식과 시문에 능통한 역관인데, 중국을 12번 다녀오면서 완당이 귀양살이

중에 연경에서 제주까지 수 차례 수백권의 책을 구해주어 나중에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림 제자 중에는 소치 허련을 아꼈다. 소치도 완당이 제주 유배중 세 번이나 찾아

갔다. 초의선사도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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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 / 초의선사가 완당에게 좋은 차를 보내는 답례로 보낸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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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 / 유배지 제주에서는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10년전 벌어졌던 부친 김노경에 대한 옥사를 이번에는 재론하여  부친,완당,동생의 관직이 삭탈

되고 죽을 처지에 있던 왕당을 벗 조인영이 구하여 겨우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로 그치게 하였다.

유배지에는 반찬,음식,옷을 나르느라 수시로 하인들이 들락거렸다. 음식과 병으로 힘들어한 완당의

유배는 9년만에 풀렸으나 그 동안 병중인 아내가 죽었다.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실제 그러한 소나무와 집은 없다고 한다. 실경산수로 치자면 이 그림은 0점

짜리 그림이라는 저자의 평이다.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 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자체 보다는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전전하다가

일인 후시츠카 손에 넘어갔다. 나중에 서예가 손재형이 몇 달을 찾아가 보상없이 되돌려받았는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맡겼다가 갚을 수 없자 사채업자는

미술품 수장가에게 팔았고, 지금은 그 아들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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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 / 유배시절 연경에서 제주까지 수 차례 수 백 권의 책을 날라다준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그림

 


   제주에 유배 중에도 글씨 부탁을 받은 완당은 종이도 없고, 내용 검증도 해야하고, 눈이 침침하고

건강이 나빠져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 들어주려 하였다. 그러면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라 하였다. 그는 지필묵이 맞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았다. 완당은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제주 유배시절 세월이 갈수

록 추사체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금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완당의 예술세계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견해가 완당시절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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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연 죽로 시옥 (端硯 竹爐 詩屋) / 완당이 전서와 예서를 섞어 쓴 명작으로, 유명한 단계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이면 만족하겠다는 선비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9년 제주 유배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대둔사에 들러 자신의 글을 떼어내고 다시 이광사의 글을 달게

하였으며, 창암 이상만의 글씨를 모질게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해 전주에 찾아갔으나 창암

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창암은 말하길 완당은 조선붓의 거친 듯 천연스런 맛을 모른다 하였다.

완당은 해배 후 3년을 보내다가 북청 유배 1년,그리고 마지막 4년을 더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유배 후 노호(지금의 용산부근)에 살면서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신품의 경지인 〈불이

선란(不二禪蘭)〉,완당 행서의 명작인〈석노시〉등을 남겼다. 그 밖에 영천 은해사,다산초당 등에

남긴 명작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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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 낡은 책,무뚝뚝한 돌이 있는 집이란 뜻

추사체의 멋과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작  


 

   추사체의 특질은 괴(怪)라 얘기한다.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글씨,그래서 얼핏 보기

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대면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완당은 문자향이나 서권기를 가슴

에 새기려면 인품과 학식을 높힐 수 있도록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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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북수고경 /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보호하는 비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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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老安堂) / 완당이 석파 이하응에게 써준 현판. 운현궁 소재 

 


  헌종이 승하하자 벗 권돈인과 함께 정쟁에 휘말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되는데, 마침 후배이자 제자인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부임하자 황초령비를 마저 찾고 비각을 세우도록 한다. 윤정현에게 써준〈침계

(枕溪)〉는 명작 중 명작이며,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예서체 현판은 장쾌한 기상과 대담한

글자의 변형을 보여준다. 1년만에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완당은 과천에서 살았는데, 그를 가장 기다린

석파 이하응의 난그림은 스승 완당을 넘어서게 된다. 운현궁에 있는 현판 〈노안당(老安堂)〉은 완당

이 석파를 위해 써준 노년 명작 중 하나이다.

 

완당은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 고증학에서 더 뛰어났다. 완당이 생각하는 감식은 금강

역사 같은 눈(金剛眼)과 혹독한 세무관리와 같은 손끝(酷吏手)과 같아야 가려낼 수 있다 하였다. 그의

안목은 오경석에게 전수되었는데,서화연구는 그의 아들 오세창에게 전수되어 간송 전형필의 고서화

를 감정하여 간송미술관을 빛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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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숭해심(山崇海深)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으로 스승 옹방강이 실사구시의 뜻을 풀이한 글에 나오는 문구이다.

유천희해(遊天戱海) / 하늘에서 노닐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양무제가 종오라는 사람의 글을 평하는 말이다.

완당의 기념비적 명작으로 완당의 기괴한 글씨가 얼마나 웅혼한 기상으로 넘치는가를 보여주는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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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무진(溪山無盡) / 구성자체가 파괴적이고 대담한 명작이다.

'계산은 끝이 없네'란 뜻으로 계산 김수근을 위해 써준 글씨이다 

 

   과천시절 완당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하였는데, 그 경지를 잘되고 못되고 가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졸(拙)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당 글씨의 본질은 '괴'와 '졸'의 만남이다.

그 대표 명작이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글자인데 완당의 위치를 가르키는 수준이기도 하다.

글씨를 쓰기 어려운 지경까지 글씨를 쓰던 완당은 봉은사 현판 〈판전(板殿)〉을 쓰고 3일 뒤 세상을

떠나 추사고택 옆 선산에 묻혔다. 판전은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한 글씨로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완당 사후 경주김씨 월성위 집안은 몰락하고 3형제 모두 아들이 없어 대가

끊겼다. 벗과 제자들은 흩어진 시원고 편지들을 모아 책을 내고 완당집으로 펴내어(1868년) 이것이

이후 완당 연구의 기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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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 그림 그리는 법에는 양자강 일만리가 다 들어 있고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 / 글씨의 뻗침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 같네

완당의 글씨 중  글자 구성에 멋이 한껏 들어있는 명품으로 예술의 정신성을 비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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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팽두부 / 최고 가는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글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예술이 평범성으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최말년의 대련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무심의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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