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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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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우글로벌 댓글 0건 조회 521회 작성일 15-05-0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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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알폰소 링기스 (지은이) | 김성균 (옮긴이) | 바다출판사 | 2013-04-15 | 원제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on (1994년)


미국 대표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공동체론. 링기스는 우리 사회가 공통의 정치질서, 경제질서 등을 세우고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합리적 공동체’를 표방해왔다고 말한다. 개인들은 소통행위를 통해 언어, 역사, 지식 등에 통합되는데, 이때 개개인 고유의 개인성은 상실된다. 

이런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자는 정신질환자, 위험인물, 야생인간 등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를 향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합리적 공동체는 고문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편입시키려 애쓰며, 여의치 않으면 격리시키기도 한다. 합리주의는 자신들을 대변하는 과학과 기술을 근거로 이런 타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고 확대하며 갱신해왔다. 

링기스는 이런 합리주의의 폭력성에 희생되는 타자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죽음 앞에 선 타자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이 고문을 견디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고유의 개인성과 이루려 했지만 다 이루지 못한 과업들을 인지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런 타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합리적 공동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타자들이 죽음의 장벽을 가로질러 내미는 맨손을 잡아 ‘타자 공동체’와 ‘죽음 공동체’를 이룰 것을 제안한다.



목차:
옮긴이 서문: 합리적 공동체와 실존적 공동체 
지은이 서문 

제1장 타자 공동체 
제2장 침입자 
제3장 얼굴들, 우상들, 물신들 
제4장 세계의 잡음 
제5장 대면하는 원소 
제6장 부패하는 육체, 부패하는 발언 
제7장 죽음 공동체 

한국어판에 부쳐 
찾아보기 




밑줄긋기: 
타자 공동체에 관하여 
합리적 공동체-구성원 각자의 제정신이 재현하기만 할 따름인 공통담론을 가진, 그리고 각자의 노력과 열정을 흡수하여 탈개인화시키는 사업기획들을 가진 공동체-의 바로 밑에는 또다른 공동체가 존재한다. (35쪽) 

타자는 고통과 ‘죽어야 할 운명’을 간직한 흉터지고 주름진 살을 그 사람에게 노출한다. 그 사람이 헐벗은 자, 빈민, 노숙자, 죽어가는 자-타자-에게 노출될 때 공동체가 형성된다. …… (타자) 공동체는 개인이 타자에게, 외부의 강제력들과 권력들에, 죽음에, 죽어가는 타자들에게 스스로를 노출하는 운동과정에서 형성된다. (37쪽) 

합리적 공동체가 한창 작업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죽음과 ‘죽어야 할 운명’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38쪽) 

타자를 고유한 과업들과 잠재력들을 지닌 사람으로 보는 행위는 내가 앞으로 발휘할 가능성들의 현장을 규정하는 또다른 죽음을 감지하는 행위이다. 타자는 나를 돌아보고 죽음의 장벽을 가로질러 맨손을 내민다. 타자는 나의 손이 지닌 솜씨들과 자질들에 호소한다. …… 타자가 요청하는 것은 이렇게 부담을 벗고 자신의 과업들을 면제받자는 것이 아니다. 타자는 자신의 손이 실행하려고 애쓰는 ‘작용들의 도식’을 나의 손에게 부탁하고, 자신의 강제력들이 결핍되지 않도록 나의 강제력들을 자신에게 보태달라고 부탁한다. (190쪽) 

타자와의 대면에 관하여 
우리는 자신의 외부에서 타자들과 마주친다. 우리의 동료들은 우리의 곁을 지나간다. 그들은 우리가 속한 환경 안의 감각표면들 사이에서 형태를 얻는다. 또한 그들은 우리를 타자들로서 대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의 감수성에 반짝이는 인광들처럼 각인된 감각적 인상들과는 다른 것들로 인정받기를 요구한다. 타자를 인정하는 과정은 타자를 지배하는 법칙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을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타자를 인정하는 과정은 타자를 존중하는 과정이다. (51쪽) 

타자를 타자로 인식하는 과정은 타자의 사고력을 압박하는 정언명령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정언명령의 강제력-인식하는 자신마저 구속하는 강제력-을 감지하는 과정이다. (54~55쪽) 

타자가 나에게 대면시키는 표면들이 ‘나의 자원 및 재능을 요구하는 노출되고 취약한 표면들’로서 나에게 호소하기 때문에 감지된다. 나를 대면하는 타자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무방비상태로 벌거벗은 맨눈을 나에게 노출한다. …… 스스로를 노출하는 육체의 적나라함은 얼굴의 적나라함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63쪽) 

우리는 타자들의 얼굴들에서 타자들의 가치들을 발견한다. 타자들이 표현하는 것들의 의미가 아닌 타자들이 구체화하는-세계의 압력들이 아닌 타자들의 기뻐하거나 원한에 사무친 내면의 강제력이 형성하는-외모에서 우리는 타자들의 관능성이 우상화하거나 물신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110쪽) 

소통행위에 관하여 
소통행위는 ‘무늬들을 글자들로 알아보는 시각행위의 탈물질화’와 ‘음성들의 흐름들을 단어들과 구문들로 알아듣는 청각행위의 탈물질화’를 실천해왔다. (124쪽) 

정보를 전달하는 표현들의 유효한 작동원인자들처럼 우리도 상호교환될 수 있다. 우리의 특이성과 우리의 무한히 분별될 가능성은 우리의 외침들과 중얼거림들, 우리의 웃음과 눈물-생명의 잡음-속에서 발견되고 청취된다. (143쪽) 
우리는 배경잡음과 소통하는 것도 소통시키고, 배경잡음도 소통시키기 때문이다. 소통은 육지와 대양들과 하늘들의 진동이 우리 육체의 구멍들에 포착되고 농축되어 확산되다가 배출될 때, 그리고 바람과 바다로 돌아가는 그 진동의 메아리를 우리가 들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150쪽) 

우리는 우리의 눈이 파악하는 빛, 우리의 자세를 유지시키는 땅, 우리가 말하면서 호흡하는 공기와 온기를 서로에게 소통시킨다. 우리는 흙, 빛, 공기, 온기의 응축물들처럼 서로를 대면하고 원초적으로 소통하는 원소들이 되어 서로를 판단한다. (183쪽) 




사람들은 합리성을 공유하면서 우리가 오늘날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여기서 합리성을 통해 사유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진지한 공동체적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 채 쫓겨난다. 링기스는 합리성의 배후에서 아무것도 명시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듯한 자들이 ‘죽음’과 같은 공동의 운명을 통해 꾸며가는 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밝혀낸다. 링기스는 말한다. “타자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타자를 위로한다.” 죽음 앞에 선 이 위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공동체를 탄생시키지 않는가? 링기스의 이 저작은 최근 낭시나 블랑쇼 등이 내놓은 공동체론과 더불어 반드시 음미되어야 할 공동체론이다.
- 서동욱(서강대 철학과 교수)

미국 대표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공동체론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나이도 다르고, 
죽어야 할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낯선 타자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몸은 뜨거웠고 정신은 혼미했다. 양팔이 무기력해지고 마비증세가 점점 흉부로 전이되고 있었다. 해변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알몸에 누더기 같은 허리감개 하나만 걸친 남자였다.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낯선 남자가 네팔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네팔인은 동네 어부를 불러와 그를 카누를 태우고 계절풍이 심하게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 해변에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시의 병원에 데려다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미국의 대표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인디아 남동부 해안도시 마하발리푸람을 여행하는 도중 풍토병에 심하게 걸려 정신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준 네팔인을 떠올리며 낯선 사람과 형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링기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회는 길 위의 노숙인이나 빈민촌의 사람들, 비정상이라 낙인찍힌 채 병원에서 죽어가는 정신질환자들,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위험인물들 등 ‘타자’의 죽음을 방치하고 조장하고 있지 않은가? 병원에서든 빈민촌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타자를 외면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할 것이다.”
링기스는 우리 사회가 공통의 정치질서, 경제질서 등을 세우고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합리적 공동체’를 표방해왔다고 말한다. 개인들은 소통행위를 통해 언어, 역사, 지식 등에 통합되는데, 이때 개개인 고유의 개인성은 상실된다. 이런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자는 정신질환자, 위험인물, 야생인간 등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를 향해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합리적 공동체는 고문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편입시키려 애쓰며, 여의치 않으면 격리시키기도 한다. 합리주의는 자신들을 대변하는 과학과 기술을 근거로 이런 타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하고 확대하며 갱신해왔다. 
링기스는 이런 합리주의의 폭력성에 희생되는 타자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죽음 앞에 선 타자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이 고문을 견디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고유의 개인성과 이루려 했지만 다 이루지 못한 과업들을 인지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n』(1994)에서 그런 타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합리적 공동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타자들이 죽음의 장벽을 가로질러 내미는 맨손을 잡아 ‘타자 공동체’와 ‘죽음 공동체’를 이룰 것을 제안한다. 

새로운 휴머니즘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의 대표작
알폰소 링기스는 미국 철학자이자 작가 겸 번역가로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클로솝스키 등 프랑스 현상학자들의 저서들을 영어로 탁월하게 옮김으로써 학계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겪은 다양한 체험들을 자신의 철학에 녹여 현상학의 독특한 갈래를 발전시켜왔다. 그는 니체의 정언명령 개념,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 메를로퐁티의 육체 개념 등 “기존의 언어와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선배 학자들의 성과를 해체하고 변형하여 다르게 사고하고 표현하는 독특한 철학과 문체를 창도”함으로써 “사상 측면에서나 행동 측면에서 대학의 상아탑에 갇힌 보통의 포스트모던한 학문들에서 멀리 벗어났다”는 평을 받는다. 고령의 나이에도 2011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세계인문학대회’에 참석해 새로운 휴머니즘의 필요성을 설파하기도 한 링기스는 이 책에 자기 철학 사상의 정수를 담아냈다.

개인이 사라진 오늘날의 세계는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 합리적 공동체에 던지는 근원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

합리적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은 합리적 실천을 통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용인할 수 있는 ‘단일하고 공통적인 담론’을 가다듬는다. 사람들은 소통행위를 하며 공통의 정치질서나 경제질서, 산업기획 등 공통과업들에 저마다 자신의 실력과 열정을 투여하는데, 그런 사업들은 그들을 흡수하여 탈개인화시키고, 그들 없이도 지속되면서 속행되거나 해체된다. 결국 사람들은 세계의 자산으로 현실화되도록 남겨둔 자신의 위치들과 행위도식들이 모두 이름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허감을 느낀다. 그 결과 사람들은 반복되는 상황들과 일과들에서 절박감을 상실하고, 동등해진 과업들과 상호교환될 수 있는 경로들의 복판에서 무기력감과 상실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세계는 무의미해지고 공허해진다. 

개인성을 지키려고 저항하는 타자들을 고문하는 공동체
합리적 공동체는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합리화 과정’에 저항하는 타자들을 색출하여 고문해왔다. 합리적 공동체는 광신도, 위험인물, 야생인간, 정신질환자, 위법자 들에게 복종이나 배상을 강요한다. 고문은 전체주의 권력이 존재하는 곳뿐 아니라 일정한 종류의 공인된 담론이 존재하는 곳에서도 제도화된다. 오늘날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보는 광장에서도,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도 고문은 더는 자행되지 않지만 지하비밀 감옥에서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고문자가 피고문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피고문자가 ‘나는 이해력을 지니지 못했다, 나의 육체는 명석하지도 않고 명민하지도 않다, 나의 육체는 단지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자백하는 것이다. …… 명예는 고문희생자에게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문명의 공인된 진리를 벗어난 황무지들을 배회하는 신비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야생인간들-로 구성된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찬양’을 요구한다. 
- 본문 214, 217쪽에서

개인의 내밀한 차이들을 부정하는 언어행위 
링기스는 합리적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소통행위만으로도 개인성이 배제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떤 사람이 수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애완 고양이를 진찰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제가 지난주에 고양이들이 걸리는 백혈병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제 페르시아산 애완 고양이 시모네가 그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박사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 질문자는 단지 자신이 연구보고서들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만한 의견을 자신보다 더 유창하게 말해주는 대변인 역할을 의사에게 요구한다. 의사 역시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의사가 진찰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말해주어야 한다. 질문자도, 의사도 ‘공식적’인 발언을 한다. 질문자는 고양이에게 느끼는 가장 내밀한 감정들을 의사에게 말하지 않고, 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개인의 가장 개인적이고 생생한 충돌들과 통찰들은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과정에서 상실된다. 합리적 공동체에서는 말의 내용이 본질적이고, 말하는 사람이 비본질적인 셈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은 어떠한가?
어머니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순간, 우리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하려고 애쓰는 어떤 말도 우리의 입 안에서 공허하고 부조리하게 울린다. 그것은 우리의 언변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할 역량이 언어 자체에 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끔찍한 무기력함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그곳에 있어야 하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사실 그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에게 건네는 위로의 몸짓, 어머니의 눈빛과 마주치는 나의 눈빛, 목소리의 온기가 더 본질적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목소리에 담긴 열기, 감수성이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와 공명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언어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또한 우리는 그런 ‘생명의 잡음’ 속에서 우리 개개인의 특이성과 무한히 분별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합리적 공동체의 폭력성을 넘어서서
죽음만을 공유한 낯선 타자와의 공동체를 향하여


알폰소 링기스는 서로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사람들마저 포함하는 유일한 공통점, 즉 ‘죽음’의 필연성에 주목한다. 합리적 공동체에서 이름 없는 공통과업을 위해 무기력하게 일상을 반복하던 개인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격심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직 나만의 것인 생명의 열기와 맥박을 느끼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른 누구와도 다르게 사랑하거나 웃거나 웃을 수 있는 자신만의 감수성’을 깨닫는다. 

죽음의 그림자는 여느 누구를 위해서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들의 끝없는 행렬들 안에서 오직 나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규정한다. 오직 나만을 유별나게 추격하는 죽음의 그림자는 ‘여전히 나를 떠받치는 땅과 그 땅이 오직 나만을 위해 간직하는 수수께끼들’, ‘오직 나의 두 손만이 베풀 수 있는 친절을 기대하며 표면화되는 윤곽들’, ‘오직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입맞춤들과 애무들을 기다리며 땅에 서있는 동료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발하는 어두운 빛 속에서 불안감은 ‘땅’과 ‘땅의 수수께끼들’과 ‘윤곽들’과 ‘나의 동료들’을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을 획득한다. - 본문 244쪽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들과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이 계시하는 가능성들을 향해 결연히 전진하는 나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 숙명적 죽음을 인식하기보다는 오직 살아 있는 나만의 것인 존재의 도식으로 나를 인도하는 정언명령을 인식한다. 그런 사람은 바야흐로 ‘타자들’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의 폭력성 때문에 상처받고 상실된 우리 안의 개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죽어가는 타자의 존재를 감지하고, 타자가 이루려고 했던 과업을 이어받아야 한다. 링기스는 그렇게 우리에게 노출된 죽어가는 타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타자의 죽음 과정을 함께 하며, 타자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위로하는 손길을 내밀자고 제안한다. 

타자의 ‘죽어야 할 운명’은 나와 유관하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타자의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감각이 단지 나로 하여금 타자를 다른 사람-오직 그 타자에게만 다가오는 죽음이 제한하는 과업들의 구역에 배치될 운명을 짊어진 사람-으로 바라보도록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는,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내가 타자를 염려할 경우 타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의 과업들과 죽음을 결연하게 추구함으로써 타자의 과업들과 죽음을 위해 타자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타자들이 세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되 시간부족이나 역량부족으로 실현하지 못한 기획들의 윤곽 속에서 내가 짊어진 운명의 모습을 발견한다. - 본문 246~247쪽에서

이 책에서 제시되는 것은 근본적인 의무, 즉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의무이다. 우리는 오늘날 공동체의 위상을 해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가 서로에게 노출되는 방식과 죽음에 노출되는 방식을 세밀히 살펴야 한다.




출처: 알라딘(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616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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