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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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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우글로벌 댓글 0건 조회 591회 작성일 18-01-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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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가의 사당,
꽉 찬 침묵을 품었다
종묘(宗廟)
빼곡한 도시에 ‘채워진 것’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거칠 것 없는 여백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꽉 찬 침묵, 공간을 압도하는 절제미, 묵직한 역사로 가득한 조선 왕가의 사당 종묘는 조선시대에 조상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만물이 사그라지는 계절, 세상 소리마저 사라지게 만들 듯 고요한 종묘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비일상적 공간
소리를 낮추게 된다. 걸음을 늦추게 된다. 영혼을 위한 공간, 종묘에서는. 삶을 영위하던 궁궐과는 대비되는 개념.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세계유산 종묘는 역대 왕과 왕후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리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과연 죽음을 이토록 신성하게 받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들어서는 순간 공간 구성 하나하나가 압도적이다. 화려하거나 짓누르는 법 하나 없이 아주 차분하게 말을 거는데,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바깥세상과는 자연스럽게 경계가 지어진다. 이곳이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라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 정도다.
1395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종묘의 시작점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 짓기 시작해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을 했는데, ‘궁궐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에 따른 것. 이후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규모가 점점 커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사이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되기도, 선조 41년에 중건을 시작해 헌종 때까지 증축을 거듭했으니 수백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셈이다.
단순하기에 더욱 집중되는 건축물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그후에 신주를 종묘로 옮겼는데, 정전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을,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죽은 뒤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겨온 임금을 모셨다. 이들 정전과 영녕전 건물은 하나같이 아주 담백하다. 좁고 긴 평면 형태로, 장식과 기교를 걷어낸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신실 19칸에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가 모셔져 있는 정전은 무려 109m의 일자 건물 양쪽 끝에 월랑이 있는 디귿(ㄷ)자 형태.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인 태종때 이러한 모습을 갖춤으로써 사당으로서의 경건함을 한층 높였다. 또한 왕위의 영속을 기원하는 듯 반복되는 둥근 열주, 무한함을 상징하는 듯 수평으로 펼쳐진 지붕도 특징적이다.
정전의 앞마당을 뜻하는 월대는 왕의 권위처럼 높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선왕들만을 위해 한가운데에 신로가 한 줄로 나있다. 신로란 쉽게 말해 신, 즉 조상의 혼령이 걷는 길로 당시 그 누구보다 우위에 있던 왕의 존재가 종묘에서만큼은 둘째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종묘 외대문을 지나면 널따란 길 한가운데 높낮이가 다른 세 단의 돌길이 별도로 나있는데 돌길 오른쪽은 왕이 걷는 어로, 왼쪽은 세자가 걷는 세자로, 가장 높은 가운데가 선왕을 위해 항상 비워두는 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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