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저항하지 말라
-법정
모란이 무너져 내리고 난 빈 자리에 작약이 피고 있다.
선연한 꽃 빛깔과 그 자태가
사람의 발길을 자꾸 가까이 끌어당긴다.
5년 전 고랭지에 피어 있는 작약을 보고
가까이 두고 싶어 농원에 가서 백 그루를 사다 심었다.
그런데 그해에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웬 검은 손이 와서
모조리 캐 가고 말았다. 그때 남은 이삭이 움을 틔워
요즘 꽃을 피운 것이다. 기특하고 고맙다.
<중간생략>
해마다 이맘때면 저녁 어스름을 타고 쏙독새가 찾아와
오두막 위를 선회하면서 ‘쏙독쏙독 쏙독쏙독 ……’
내 벗이 되어 주었는데 2,3년 전부터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토끼도 해가 기울면 오두막 가까이 내려와 뜰에서 어정거리거나
채소밭에 들어가 요기를 하고 갔는데
요 몇 해 동안은 자취를 볼 수 없다.
겨울철에 산수국 대궁을 뜯어먹느라 그 아래
배설물을 남기고 간 자취를 보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밀렵꾼들 때문에 몹시 조심하는 것 같다.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뜻밖에 묵은 일기장에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충 훑어보면서 내 삶의 자취가
빛이 바랜 사진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5년 6월 17일(토요일), 남불 생 레미에서 쓴 대목.
여행 중에 가지고 간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집>에서
인용한 글이 실려 있다.
홀로 명상하라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이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말라.
굳이 기억하려 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에게 매달리면 다시는 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끝없는 고독, 저 사랑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토록 순결하고 그토록 새롭게 명상하라.
저항하지 말라.
그 어떤 것에도 장벽을 쌓아두지 말라.
온갖 사소한 충동, 강제와 욕구로부터
그리고 자질구레한 모든 갈등과 위선으로부터
진정으로 온전히 자유로워지거라.
그러면 팔을 활짝 벌리고
삶의 한복판을 뚜벅뚜벅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으리라.
출처 : > 법정 스님의[아름다운 마무리]
≪후기≫
유성/ 박한곤
아름다운 마무리를 생각할 나이에 근접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새벽녘에 책꽂이 한편에 쉬고 있는 법정 스님 책이 마음에 와 닫는다.
늙어 가면 고독이 찾아온다.
고독이 오기 전에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독을 즐기려면 진심으로 고독을 사랑해야 한다.
내면에 잠들려 하는 나를 불어내어
늘 자연과 교감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거짓 없는 自然愛, 그 속 으로의 의탁은
저항의 요소를 없애주고 순리를 따라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한다.
고독이라는 근육은 소유의 한계와
버릴 줄 아는 힘을 길러주고
우리가 찾아갈 본향의 길을 알려주기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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